"긴 정자 너머, 옛 길가에, 푸른 풀은 하늘까지 이어지네; 저녁 바람이 버들을 쓰다듬고 피리 소리 사라지며, 석양은 산 너머 산. 하늘 끝, 땅 모퉁이, 친구들 절반은 흩어졌네; 한 잔 탁주로 남은 즐거움 다하니, 오늘 밤 이별의 꿈 차갑구나." 이 널리 사랑받는 '송별'이라는 노래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이 곡은 미국 음악가 스티븐 포스터가 작곡했으며, 작사자는 중국 근대 예술계의 뛰어난 선구자인 이숙동(李叔同), 후에 홍일법사(弘一法師)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번화한 상하이에서 예술의 일본으로

이숙동은 1880년 10월 23일 톈진에서 태어났으며, 18세 때 어머니와 함께 상하이로 이주했습니다. 이 번영하는 도시에서 그는 난양공학(南洋公學, 현재 상하이교통대학의 전신)에서 공부할 뿐만 아니라, 저명한 교육자 황염배(黃炎培)를 포함한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과 교류했습니다.

1905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음악, 회화, 연극 예술에 전념했습니다. 그는 연극 협회를 설립하고, '춘희(椿姫)'에서 여장을 하고 공연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나중에 '춘희유사(椿姫遺事)'를 저술했습니다. 일본에서 유학하는 동안, 그는 반차(番茶, 일본 녹차)를 마시는 습관을 들였고, 귀국 후에도 이 생활 습관을 유지했습니다.

항저우의 차향이 가득한 세월

이숙동이 처음 항저우를 방문한 것은 1902년으로, 단 한 달간의 짧은 체류였지만, 용금문(湧金門, 항저우의 오래된 성문) 밖에서 차를 마신 인상을 남겼습니다. 두 번째 방문은 1911년(중화민국 원년)이었으며, 이 항저우 체류는 약 10년에 달했습니다.

항저우의 서호(西湖) 가에서, 이숙동은 린위탕(林語堂), 후스(胡適), 위다푸(郁達夫), 바진(巴金) 등 동시대 인물들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샤미엔준(夏丏尊), 장단슈(姜丹書)와 함께 서호를 야유(夜遊)하며 '서호야유기(西湖夜遊記)'를 남겼는데, 여기에는 차향과 물밤, 연꽃의 즐거움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히 징춘위안(景春園)의 누각에서 홀로 차를 즐기는 고요한 시간을 소중히 여겼으며, 서호에서의 차 마시는 경험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습니다.

차, 예술에서 수행으로

1916년, 이숙동의 인생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후파오사(虎跑寺, 항저우의 유서 깊은 사찰)에서 21일간의 단식을 선택했습니다. 상세히 기록된 '단식일기(斷食日記)'에서, 차는 외부 세계와의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 준비 단계의 '반차(番茶)';
  • 단식 기간 중의 '매차(梅茶)'와 '염매차(鹽梅茶)';
  • 회복기에 홍차를 맛볼 때, 그는 "아직 차맛이 나지 않는다"고 느꼈으며, 이는 감각과 정신의 변화를 여실히 반영합니다.

이 단식은 그가 이숙동에서 홍일법사로 변모하는 상징이 되었으며, 차는 그의 화려한 세속에서 초월적인 고요함으로의 마음의 여정을 지켜보았습니다.

평생을 함께한 차, 선(禪)의 세계

홍일법사는 예술가의 예민한 감성과 고승의 선(禪) 깨달음을 완벽하게 융합시켰습니다. 그의 삶에서 차는 단순한 일상의 음료가 아니라, 정신 수행의 태도를 상징했습니다.

남송(南宋)의 조길(趙佶, 송나라 황제로 예술가로도 알려짐)의 '대관차론(大觀茶論)'에 있는 "충담한결, 운고치정(沖澹閒潔, 韻高致靜)"(순수하고 조용하며 깨끗하고, 고상한 운치와 고요한 정취가 있다)이라는 말은 홍일법사가 평생 추구한 경지 그 자체입니다. 그의 젊은 시절 산다화(山茶花)에 관한 시에서부터, 만년의 단순한 반차, 매차, 홍차에 이르기까지, 차는 항상 그의 인생의 진리를 탐구하는 여정에 함께했습니다.

이숙동의 인생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한 잔의 맑은 차처럼, 시대의 격류 속에서, 점차 순수하고 초월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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